이상춘이란 누구인가
이상춘(李相春)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직후 1910년 9월 25일 대구부 남용강정(현재 공평동)에서 태어나 예술이란 매체를 통해 민족과 계급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수차례 투옥되고 병마와 싸운 끝에 1937년 11월 13일 경성부 돈암정(현재 돈암동)에서 2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그리하여 생전에 온전한 조국에서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비운의 아방가르드 예술가이다.
어떤 예술가였던가?
일제강점기에는 대개 두 유형의 예술가가 있었는데, 하나는 예술을 현실도피처로 삼으며 심미적 가치를 추구한 모더니스트 예술가이고, 다른 하나는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당대 식민지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극복하려 했던 아방가르드 예술가이다. 이상춘은 후자 가운데서도 발군이었지만 해방 이후 분단과 이념에 의해 왜곡된 정치사와 미술사로 인해 그의 존재는 잊히게 되었다.
이상춘은 카프(KAPF) 소속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 식민지 민중과의 소통을 위해 필요한 다양한 매체, 이를테면, 판화, 삽화, 포스터, 포토몽타주, 잡지발행, 그래픽 디자인, 가두극장, 연극 무대장치, 이론, 비평, 교육 등을 활용하고, 당대 첨단 아방가르드 양식인 다다이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러시아 구성주의뿐만 아니라 리얼리즘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의 사회적 이상을 구현하려 했다.
이상춘은 전위적인 예술운동으로 《O科會》 전시회, 『연극운동』 발행, 극단 ‘대구가두극장’, ‘메가폰’, ‘신건설’ 등을 주도하며 종횡무진 활동했지만 언제나 일제의 감시를 받거나 수배 중이었고, 결국 수차례 검거되고 장기간 수감되면서 그의 작품이나 기록은 대부분 유실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의 치열했던 삶과 예술 활동이 마치 부재했던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결코 온당치 못할 것이다.
왜 지금 이상춘인가?
이상춘이 ‘지금 여기’에서 중대한 이유는 한편 그의 아방가르드 예술 행적이 모더니즘 중심의 한국/대구 근대미술의 지평을 확대 및 재편하는 동시에 빈곤한 한국/대구 현대미술(컨템퍼러리 아트)의 뿌리를 강건히 하는 데 핵심적이고, 또한 그의 아방가르드 예술정신이 특히 지역의 현대미술을 발전시켜 지역의 오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침체 상황을 혁신하는 데도 구심적이기 때문이다.
이상춘의 시대와 미술
이상춘은 어떤 시대를 살았으며,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예술가였을까? 그는 왜 그간 잊혀야만 했고, 우리는 이제 왜 그를 되살려 다시금 조명할 필요가 있을까? 이상춘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에 태어나 대구보통학교 시절 3.1운동을 경험했고 청소년기에 그림에 심취하면서도 ‘노동소년회’ 등에서 활동하며 현실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는 대구상업학교에서 퇴학할 만큼 미술에 몰두했지만 당시 자신과 민족이 처한 식민지 현실에서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미술의 시대적 역할을 모색해간 아방가르드 예술가였다.
그러면 이상춘이 직면했던 일제강점기 한국미술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당시 미술계는 식민지 조선미술인들이 대개 식민 본국으로부터 선진미술을 도입했던 만큼 일본미술의 상황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처럼 신속하게 서구의 다양한 아방가르드 양식을 수용하고 있었다. 실제로 1920, 30년대 일본에서는 형식주의 모던 아트는 물론 다다이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러시아 구성주의 등의 아방가르드 미술이 신흥미술 단체인 ‘삼과(三科)’, ‘마보(MAVO)’, ‘조형(造型)’ 등을 통해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국 근대미술사에는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개최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허용한 인상파나 추상계열의 순수미술만 존재했을까? 과연 우리에게는 서구나 일본처럼 제국주의에 저항하며 대안적 근대사회를 위해 투신한 아방가르드 예술가가 없었을까? 존재했지만 불행히도 망각되었을 뿐이다. 일례로 이상춘은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리얼리즘, 러시아 구성주의 등의 당대 최첨단 양식을 자유롭게 활용하며 일제식민주의,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민족, 계급해방을 위해 선봉에 선 전위 미술가이자 카프(KAPF) 연극인이었다.
하지만 이상춘은 대부분의 카프 예술인들과 함께 우선 현존하는 작품이 별로 없다는 이유 이외에도 한편 일제 문화정치에 순응하며 생존한 뒤 해방 이후 득세한 형식주의 모더니스트의 패권주의로 인해, 또한 해방 이후 남북 분단과 매카시즘의 지속으로 인해, 한국 근대(미술)사의 주류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모던 아트로부터 컨템퍼러리 아트로의 미술사적 전환의 맥락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이상춘과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세계 각지에서 컨템퍼러리 아트의 역사적 뿌리로 활발하게 재조명받는 시대를 맞고 있다.
운영시간
1PM - 6PM
월・화 및 공휴일 휴무
대구광역시 중구 명덕로35길 26
COPYRIGHT (c)공간리상춘 ALL RIGHTS RESERVED.
이상춘이란 누구인가
이상춘(李相春)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직후 1910년 9월 25일 대구부 남용강정(현재 공평동)에서 태어나 예술이란 매체를 통해 민족과 계급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수차례 투옥되고 병마와 싸운 끝에 1937년 11월 13일 경성부 돈암정(현재 돈암동)에서 2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그리하여 생전에 온전한 조국에서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비운의 아방가르드 예술가이다.
어떤 예술가였던가?
일제강점기에는 대개 두 유형의 예술가가 있었는데, 하나는 예술을 현실도피처로 삼으며 심미적 가치를 추구한 모더니스트 예술가이고, 다른 하나는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당대 식민지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극복하려 했던 아방가르드 예술가이다. 이상춘은 후자 가운데서도 발군이었지만 해방 이후 분단과 이념에 의해 왜곡된 정치사와 미술사로 인해 그의 존재는 잊히게 되었다.
이상춘은 카프(KAPF) 소속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 식민지 민중과의 소통을 위해 필요한 다양한 매체, 이를테면, 판화, 삽화, 포스터, 포토몽타주, 잡지발행, 그래픽 디자인, 가두극장, 연극 무대장치, 이론, 비평, 교육 등을 활용하고, 당대 첨단 아방가르드 양식인 다다이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러시아 구성주의뿐만 아니라 리얼리즘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의 사회적 이상을 구현하려 했다.
이상춘은 전위적인 예술운동으로 《O科會》 전시회, 『연극운동』 발행, 극단 ‘대구가두극장’, ‘메가폰’, ‘신건설’ 등을 주도하며 종횡무진 활동했지만 언제나 일제의 감시를 받거나 수배 중이었고, 결국 수차례 검거되고 장기간 수감되면서 그의 작품이나 기록은 대부분 유실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의 치열했던 삶과 예술 활동이 마치 부재했던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결코 온당치 못할 것이다.
왜 지금 이상춘인가?
이상춘이 ‘지금 여기’에서 중대한 이유는 한편 그의 아방가르드 예술 행적이 모더니즘 중심의 한국/대구 근대미술의 지평을 확대 및 재편하는 동시에 빈곤한 한국/대구 현대미술(컨템퍼러리 아트)의 뿌리를 강건히 하는 데 핵심적이고, 또한 그의 아방가르드 예술정신이 특히 지역의 현대미술을 발전시켜 지역의 오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침체 상황을 혁신하는 데도 구심적이기 때문이다.
이상춘의 시대와 미술
이상춘은 어떤 시대를 살았으며,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예술가였을까? 그는 왜 그간 잊혀야만 했고, 우리는 이제 왜 그를 되살려 다시금 조명할 필요가 있을까? 이상춘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에 태어나 대구보통학교 시절 3.1운동을 경험했고 청소년기에 그림에 심취하면서도 ‘노동소년회’ 등에서 활동하며 현실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는 대구상업학교에서 퇴학할 만큼 미술에 몰두했지만 당시 자신과 민족이 처한 식민지 현실에서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미술의 시대적 역할을 모색해간 아방가르드 예술가였다.
그러면 이상춘이 직면했던 일제강점기 한국미술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당시 미술계는 식민지 조선미술인들이 대개 식민 본국으로부터 선진미술을 도입했던 만큼 일본미술의 상황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처럼 신속하게 서구의 다양한 아방가르드 양식을 수용하고 있었다. 실제로 1920, 30년대 일본에서는 형식주의 모던 아트는 물론 다다이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러시아 구성주의 등의 아방가르드 미술이 신흥미술 단체인 ‘삼과(三科)’, ‘마보(MAVO)’, ‘조형(造型)’ 등을 통해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국 근대미술사에는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개최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허용한 인상파나 추상계열의 순수미술만 존재했을까? 과연 우리에게는 서구나 일본처럼 제국주의에 저항하며 대안적 근대사회를 위해 투신한 아방가르드 예술가가 없었을까? 존재했지만 불행히도 망각되었을 뿐이다. 일례로 이상춘은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리얼리즘, 러시아 구성주의 등의 당대 최첨단 양식을 자유롭게 활용하며 일제식민주의,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민족, 계급해방을 위해 선봉에 선 전위 미술가이자 카프(KAPF) 연극인이었다.
하지만 이상춘은 대부분의 카프 예술인들과 함께 우선 현존하는 작품이 별로 없다는 이유 이외에도 한편 일제 문화정치에 순응하며 생존한 뒤 해방 이후 득세한 형식주의 모더니스트의 패권주의로 인해, 또한 해방 이후 남북 분단과 매카시즘의 지속으로 인해, 한국 근대(미술)사의 주류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모던 아트로부터 컨템퍼러리 아트로의 미술사적 전환의 맥락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이상춘과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세계 각지에서 컨템퍼러리 아트의 역사적 뿌리로 활발하게 재조명받는 시대를 맞고 있다.